번아웃과 클로드와의 면담
오후 내내 클로드와 대화했다.
처음엔 이직 고민이었다. 회사 근처로 이직하면 출퇴근이 편해질 것 같았고, 업무 범위가 명확한 곳에 가면 덜 지칠 것 같았다. 괜찮아 보이는 공고 하나를 붙잡고,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만들지 상담을 시작했다.
그런데 대화가 흐르면서 이상한 지점에 도달했다.
첫 번째 발견: 나는 회사를 바꾸고 싶은 게 아니라 '벗어나고 싶은' 상태였다
이직할 회사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, 정작 내 강점은 최대한 숨겨야 붙는다는 결론이 나왔다. AI 활용, 코드 작업, 개인 프로젝트들, 이 모든 걸 숨겨야 '조용한 실무자'로 보여서 합격할 수 있다는 거였다.
그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. 왜 내 강점을 숨기고 면접을 봐야 하지? 그 회사가 나한테 정말 맞는 곳일까?
알고 보니 나는 "그 회사가 좋아서"가 아니라 "지금 회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" 고민하고 있었던 거다. 회사는 대안이 아니라 도피처였다.
두 번째 발견: 나는 5인분을 혼자 하고 있었다
현재 회사에서 나는 브랜딩·웹/UI·이커머스·코드·자동화까지 전부 담당하고 있다. 칼퇴하고 효율적으로 해내려 애쓰지만, 그래도 지친다. 클로드가 이렇게 말했다.
"업무량이 문제가 아니라 범위가 문제일 수 있어. 5인분을 혼자 하면서 칼퇴까지 하는 거 자체가 이미 무리야."
맞는 말이었다. 몸이 먼저 알았다. 머리는 "난 잘 해내고 있는데 왜 힘들지?" 하는 중이었지만, 사실 잘 해내느라 힘든 거였다.
세 번째 발견: 나의 조급함은 통장 때문이 아니라 비교 때문이었다
통장에 5개월치 생활비가 있다. 객관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상태다. 그런데 왜 이렇게 조급할까?
대화 중에 깨달았다. SNS에 빠르게 성공하는 사람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. 20대에 MRR $10k 찍는 사람, AI로 1인 기업 세우는 사람, 퇴사 후 월 천 버는 사람.
하지만 그건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성공한 0.1%의 단면이었다. 내가 보고 있는 건 편집된 이미지였다.
클로드가 말해줬다.
"지금 수익 내는 사람들도 3년 전엔 너처럼 부러워하는 쪽이었다. 세상엔 속도가 없다. 네 시계로 살면 된다."
네 번째 발견: 내가 일을 벌이는 트리거
AI 서비스나 디지털 제품을 결제할 때마다 **"나도 할 수 있겠다"**는 생각이 든다. 그 생각이 들면 새 프로젝트를 시작한다. 일주일 뒤 어느정도 모양새를 갖추면 이걸 정말 세상에 내놓아도 될까? 주저하다가, 더 핏한 수익화 모델이 있지 않을까 하고 또 다른 프로젝트를 기웃기웃. 이게 내가 여러 개의 브랜드와 사이드 프로젝트를 동시에 굴리게 된 이유였다. "AI로 만들었어요" 하고 SNS상에 보이는 모든 상품들이 내게는 빨리 움직이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.
이 패턴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. 트리거가 보이면 의식적으로 멈출 수 있다.
다섯 번째 발견: 나의 진짜 동력은 돈이 아니라 '감탄'이었다
대화가 길어지다 클로드가 물었다.
"1000명이 공짜로 쓰면서 좋아하는 것 vs 10명이 돈 내고 사는 것. 어느 쪽이 더 기뻐?"
나는 1초의 고민도 없이 1000명이 공짜로 쓰는 쪽을 택했다.
이어진 질문.
"지금까지 가장 기뻤던 인정의 순간은?"
내가 만든 것, 내가 만드는 방식에 사람들이 "우와"할 때.
이 두 답으로 알았다. 나는 돈이 아니라 감탄을 원했다. 그런데 "돈이 되어야 인정받는 것"이라고 스스로 연결시켜놓고, 돈 안 되는 건 시작도 못 하는 상태였다. 그러느라 진짜 원하는 감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.
결심한 것
수익화에 집착하지 않는다. 수익화는 결과지 목표가 아니다. 돈이 안 되는 것도 만들 수 있어야 감탄이 쌓이고, 감탄이 쌓이면 돈은 자연히 따라온다.
일을 벌이지 않는다. 지금 벌려놓은 것들만 유지한다. 분기에 새 프로젝트 1개 이하. 트리거가 와도 48시간 기다린다.
회사는 지금 그대로. 벗어나려고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게 답이 아니다. 어디 가도 5인분일 거면 차라리 익숙한 5인분이 낫다.
속도 대신 방향. 빨리 가는 게 아니라 맞는 방향으로 가는 게 먼저다. 내 시계로 간다.
기록한다. 내가 쓰는 방식, 내가 발견한 것들을 계속 기록한다. 그게 곧 나다.
지금의 나에게
너는 이미 충분하다. 내 속도로 가면 된다. 오늘 안 해도 괜찮다.
번아웃은 네가 부족해서 온 게 아니라, 네가 너무 많이 해내려 해서 온 거다. 그걸 인정하는 것부터가 회복이다.
2026년 4월, 긴 오후의 대화 끝에.